선교 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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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제일
도전과 함께 시작한 해외 선교
길버트 M. 밸런타인
1874년 8월 말, 교회가 존 앤드루스를 최초의 해외 파송 선교사로 결정했을 때 앤드루스와 교회는 큰 ·곤혹을 치렀다. 교회 지도자들은 다양한 우려와 씨름하면서 마지막 결정을 계속 미뤘다. 앤드루스 선교사는 교회의 공식 결의 없이 격려만 받은 채 스스로 유럽으로 떠나야 할 판이었다. 그 당시 교회 형편으로 봤을 때 해외 선교가 우선순위여야 했을까? 교회는 해외 선교에 적합한 사람을 선택한 것일까? 그는 준비됐나? 미국 교회는 앤드루스가 발휘하는 역량의 공백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계시를 통한 구체적인 지시는 왜 없었을까? 재정은 충분했는가? 마침내 이 토론에 대해 다소 어색한 결론이지만 1874년 대총회 총회 마지막 날 밤에 피곤한 대표들은 앤드루스를 최대한 신속히 파송하도록 대총회 위원회에 ‘지시하기로’ 가결했다. 세계 선교는 우선순위가 되어야 했다.
출발
앤드루스는 그로부터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9월 15일 가족과 함께 보스턴으로 떠났다. 앞으로 겪을 애매한 재정 지원과 제약의 복선이라도 되는 듯 그는 자신에게 딸린 두 자녀의 교통비, 개인 서적 운송비, 선교 사업을 잠시 멈출 때의 경비까지 스스로 충당해야 했다.
해외 선교의 필요성을 더 깊이 자각한 교회는 1870년대부터 외국어 번역에 적합한 간단한 전도 소책자를 마련하고자 애썼다. 유능한 번역자를 찾는 데도 어려움을 겪었다. 해외 선교는 고위 지도부 간의 심각한 갈등과 지역 전도 프로젝트라는 더 중요해 보이는 국내 우선 과제들이 끼어들면서 계속 지연됐다.
앤드루스가 스위스에 도착한 뒤 그의 선교는 인력 부족 때문에 위기를 맞았다. 외국인 선교사인 그는 도착하자마자 현지 언어를 배워야 했고, 정규직 스위스인 근로자 2명(프랑스어 구사자 1명, 독일어 구사자 1명)의 도움을 받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그의 조수는 선교의 어려움에 금세 낙심하여 시계 제조를 하던 본래의 일로 돌아갔다. 독일어를 구사하는 조수인 야코프 에르츠베르거도 갈등으로 탈퇴하고 마을을 떠났다. 앤드루스는 몇 달 동안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독일어 구사자 동료를 회복시키고, 안식일 준수자들 사이에 생긴 불화의 골을 메우고, 선교를 다시 궤도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나머지 한 명은 결국 되돌아오게 하지 못했다.
도전에 맞서
다른 어려움도 있었다. 선교에 필요한 재정을 제공해야 할 스위스 안식일 준수자들의 조직망은 시계 사업을 되살리려는 노력으로 인해 앤드루스가 도착하기 직전에 엄청난 빚을 지고 있었다. 더 중요해 보이는 가족 부양의 의무가 우선순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관대하게 도왔지만 지역 선교 자원은 부족했다. 유럽에서 전도회 비용이 많이 든다는 사실도 고민거리였다. 집회에 사용할 넓은 공간을 빌리는 데도 미국보다 최대 3배나 비쌌다.
앤드루스는 문화적·지리적 장벽을 극복하고자 용감하게 잡지 출판을 시작했다.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배틀크리크 지도자들은 단시간 내에 선교 사업이 완전히 자립하길 기대했지만 이후 10년이 더 걸렸다. 그동안 벌어진 상황에 배틀크리크 지도자들은 좌절했고 앤드루스는 부당한 비난과 오해에 받았다. 그는 제한된 재정으로 선교와 성장에 집중하느라 어려움을 겪었다.
앤드루스는 프랑스어를 배웠다. 예상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렸고, 45세가 된 그에게 프랑스어는 상상 이상으로 어려웠다. 하지만 끈기 있게 노력했다. 언어는 그의 성공에 중요한 우선순위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해냈다. 낙담과 혼란을 극복하고 실수를 통해 배우면서 힘들게 문화 충격에 대처하는 법을 배웠다.
선교 사업의 성공에 가장 심각한 위협은 그가 1874년 스위스에 도착했을 당시 유럽과 미국을 압도하기 시작한 심각한 재정 불황이었다. 재정 불황은 1879년까지 오래 지속됐다. 경제학자들은 그 일을 ‘진정한 최초의 국제적 위기’라고 불렀고 앤드루스가 도착한 지 18개월 뒤 선교 잡지인 프랑스어 『시조』(Les Signes des Temps)를 창간하면서 상황은 더 복잡해졌다.
경제학자들이 명명한 ‘장기 불황’은 1873년 비엔나 증권거래소 붕괴로 시작됐다. 금융 위기는 유럽 전역으로 퍼지고 미국까지 확산돼 미국은 ‘금본위 제도’를 채택했다. 공황이 뒤따랐고, 은행은 문을 닫았고, 미국 전역에서 1만 8,000사업체와 289개 철도가 파산했다. 실업이 급증했고 가계 소득은 감소했다. 교회 재정도 위축됐다.
선교를 위한 쇄신
1879년이 되자 시대는 ‘완전히 최악으로’ 치달았고, 제임스 화잇은 “나라에 돈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 위기는 불확실성, 혼란, 공황의 시기로 이어졌다. 대총회 사무실에서 일하던 근로자들이 해고됐다. 리뷰 앤드 헤럴드 출판사는 급여를 17% 삭감하면서도 운영을 유지하기 위해 이스트코스트 보험사에서 막대한 고가 대출을 받았다. 경영진은 공실을 메우고자 양모 뜨개질 사업을 시작해 추가 수입을 창출하려고 했다. 엘렌 화잇은 퍼시픽 출판사가 파산의 길로 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의 대규모 교회 신축 프로젝트는 재정 부족으로 난항을 겪었고, 배틀크리크에서는 3,000석 규모의 새 성전을 짓는 과정에서 막대한 부채가 남아 있었다. 엘렌 화잇은 교회가 수많은 신규 프로젝트에 “너무 깊이” 개입했다고 한탄했다.
처음에 화잇은 “해외 선교는 방해받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해외 선교가 사업의 우선순위였다. 하지만 위기가 심해지자 화잇도 긴축을 요구하며 해외 사업을 중단하도록 요청했다. 사업의 핵심에 “당분간 재정이 더 필요하다.”라고 그는 촉구했다. 해외 선교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스위스에서 계획했던 새 출판사도 연기됐다. 이후 스위스 사업을 접고 영국으로 이전해 러프버러의 사업을 강화해야 한다는 조언을 받았다. 이렇게 하면 비용이 덜 들고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 이론적으로 재림교회 기별에 더 빨리 반응할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영국이 충분히 많은 구독자를 확보하면 새로운 출판사를 그곳에 세울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새로운 계획은 앤드루스에게 큰 타격이었다.* 하나님이 마련하신 은혜의 섭리로 스위스에 해외 사역의 문을 열었다는 사실을 지도부는 잊었단 말인가?
이런 혼란스러운 시기를 지나며 앤드루스는 해외에서도 선교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자신의 믿음을 굳건히 유지했고, 유럽에서의 그의 사역을 위해 계속해서 기도했다. 그와 스티븐 해스컬은 1879년에 새로 지은 배틀크리크 교회에서 기도와 청지기에 초점을 맞춘 새해 첫날 집회를 시작했다. 두 지도자는 교회 재정을 위해 새로운 계획을 소개했다. 십일조는 이전에 시행되던 부적합한 자선 제도를 대체했다. 금융 위기로 급하게 요구되던 큰 변화이자 먹구름 사이로 비치는 한 가닥 희망이었다. 교우들은 희생적으로 큰 기부에 동참했다. 1879년이 지나면서 금융 위기는 잦아들기 시작했다.
스위스로 돌아가기 직전인 1879년 3월 대총회 총회에서 유럽 선교를 보고하는 말미에 앤드루스는 또 다른 획기적인 제안을 했다. 대총회 행정부에 ‘해외 사업’을 특별히 담당할 ‘행정자’를 선출하자는 안건이었다. 그러면 전에 겪었던 답답한 지연과 오해 등이 없이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고, 무엇보다 선교를 진정한 최우선으로 삼을 수 있었다. 그의 제안은 몇 달 뒤 승인되고 채택됐다. 해외 선교를 우선순위로 삼고자 애쓰는 교회 앞에는 험난한 바다가 놓여 있다. 해외 선교는 성공한 과제이자 세대마다 새롭게 주어지는 과제이다.
* 도전적이면서도 고무적이었던 재림교회 선교 발전 시기에 관해 다음에서 자세한 내용을 찾을 수 있다. Gilbert M. Valentine, J. N. Andrews: Mission Pioneer, Evangelist and Thought Leader, (Nampa, Idaho: Pacific Press Pub. Assn., 2019) pp. 630~638
길버트 M. 밸런타인(Ph.D.) 라시에라 대학교 교육대학에서 은퇴해 현재 H. M. S. 리처드 신학대학원에서 시간 강사로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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